설교요약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바라보자(10)_그리스도의 겸비의 영광⓵(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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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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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바라보자(10)

그리스도의 겸비의 영광⓵(빌 2:5-8)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으로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제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되게 살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너희의 마음에 품으라 하고 말씀한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6절 이하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여기 본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작은 숫자 1)이 적혀 있죠. 그 밑에 줄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보면 ‘또는 형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밑에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했을 때 이 형체라고 번역한 이 말과 같은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모르페’라고 하는 말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모양,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체 이렇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육신의 영광

그런데 하나님이 종의 형체, 즉 육신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왜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는다는 것은 인간의 사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유한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저급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이든 어떤 사상이든 인간은 육신적인 것을 버려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동물적인 것이고 인간의 육신은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욕은 추하고 더러우며, 육신의 악함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육신적인 추한 것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가지가지 주장들이 난무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실제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고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령처럼 눈에는 보이는데 실체는 없는 존재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육신적인 연약함, 굶주리고 피곤해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들은 인간의 철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사상과 철학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대 철학 가운데 영지주의는 하나님이 물질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령한 분이기 때문에 물질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영주주의자들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물질을 창조한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니다. 물질과 상관없는 참 하나님은 따로 있다.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하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세계가 이렇게 흠이 있고 문제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 흠 있는 세계를 벗어나고 이렇게 문제 있는 육체를 벗어나는 길은 그리스도를 깨닫는 영적 지식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물질세계는 비록 타락하여 현재 상태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세계, 즉 타락 이전의 세계는 아름답고 선한 세계였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차이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물체가 아니시며 물체를 넘어서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 만물 가운데에 편만하게 계시는 분으로서, 어디에나 계시는 신령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육신을 입을 수 있습니까? 고대 세계의 가르침에 의하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육체라고 하는 추하고 더러운 것 안에 순결한 영혼이 갇혀 있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육체의 감옥을 벗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욕과 고행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고행의 길을 갔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고행의 길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다. 육체는 더럽고 추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찾아와 육체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영과 물질을 구별해놓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빛과 어둠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이 되시는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비슷한 예가 될 수 있을까?

최근 반려견 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그쪽으로 많은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그중에는 동물행동 교정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전문가 한 분이 자기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한 것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개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 심지어 개똥의 맛을 봤다고 합니다. 그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개를 사랑했는지 그렇게까지 해서 개를 이해하고 저런 실력자가 되었구나! 그런데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그 정도를 넘어선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철학적 용어로는 무한자가 유한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육신을 입으신 일입니다. 이 일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의 육체를 입는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무죄하신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죄인들 가운데에 오신 일입니다. 죄인들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사들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십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 한 분은 아프리카로 가셔서 원주민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굉장히 빈약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빈약하고 의료 수단도 없고 거처도 너무나 열악한 상황인데 그 속에 들어가서 살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선교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선교사가 그렇게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대 문화 속에 살다가 참으로 열악한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입는 것, 그들이 먹는 것, 그들이 자는 숙소와 동일하게 지낼 수 있을까? 우리는 개념적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낼 때 선교부에서 정해놓은 기준이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 기준을 가지고 그곳에서 살게 합니다. 현지인들은 10만 원이면 한 식구가 한 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아무리 헌신을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곳에서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찾아간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이 선교사님은 거의 원주민들 수준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분입니다.


성육신의 영광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인 가운데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일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말도 안 될 만큼 어려운, 그리고 놀라운 일이라고 하는 사실은 양자의 차이를 잘 알아야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아야, 인간의 수준은 어떠한지 알아야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찾아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만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높고 찬란한 것인지를 아는 만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낮고 천한 존재인지를 아는 만큼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과 같이 되셨다고 하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본체의 그 탁월한 것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인간이, 더군다나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여 어떤 상태인가를 예민하게 날카롭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제서야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나타내는 그 탁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그 일을 자원하여 행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그 일을 자원해서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겸손하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더 나아가서 7절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이 부분은 겸손을 넘어서서 겸비라고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이것은 겸손입니다. 그런데 “종의 형체를 가져”라고 하는 것은 겸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종의 수준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7절).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신 것을 “케노시스이론”이라고 합니다. “케노시스”는 헬라어로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형상에서 인간의 형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 되심을 버린 것을 의미하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 되심은 가지셨으나, 구속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이 일을 진행하시는 리더십은 성부에게 인정을 인정하고, 성부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는데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으로 가리워져서 비밀스럽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없이는 신성의 영광을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그는 겸손하고 겸비하여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성으로 신성의 영광을 덮어 가리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결국은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겸손, 더 나아가서 겸비하심의 탁월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감동이 되고, 우리 자신도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겸손과 겸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닮아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일을 존 칼빈은 “자기 부인”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는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과 그리스도의 겸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교회를 진정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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