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3)_그리스도는 진리의 선포로써 다스리신다(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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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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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3)

그리스도는 진리의 선포로써 다스리신다(딤후 4:1-5)


그리스도의 통치대권으로 내리는 엄숙한 명령 

영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이후에 승천하사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지상에는 몸된 교회를 두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실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방법은 진리의 선포입니다. 오늘 말씀을 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서는 아주 엄숙한 말씀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명령의 권위는 스승된 자기의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자기를 세우신 분,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바로 그분의 영광을 근거로 명령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통치 대권을 가지고 디모데 목사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그 명령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2절). 여기 “전파하라”는 말은 “전도하라”는 말씀으로 듣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전도하라”가 아닙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는 “케뤼소”라는 동사인데 “케리그마”라고 하는 명사와 같은 어근입니다. “케리그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진리 체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교회는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케리그마의 선포 행위가 가정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케리그마, 즉 십자가의 진리가 선포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십자가를 붙들고 살고 십자가를 가지고 나아가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가 선포되는 것, 바로 이것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한다면”‘너는 말씀을 선포하라“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공동 번역 성경은 “말씀을 선포하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중요성

왜 구태여 “전파하라”인지 “선포하라”인지 따지는 것일까요? “선포하라”라고 하면 설교 행위가 더 강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 행위는 교회 안에서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며 교회의 증표입니다. “말씀의 참된 선포”는 교회가 교회되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참 교회인지 따져보자.” 그럴 때 그 교회가 참 교회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따른다고 하는 교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어디 세미나 같은 데 다니시더니 선포하는 메시지가 좀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얘기를 들어보니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교단 목사님인가?”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우리 교단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이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교리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메시지가 변했습니다. 이분은 교단을 떠난 적도 없고 이 교리를 부인한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포하는 메시지는 다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참 교회는 무엇으로 분별할 것인가? 물론 교단이 참된 교리를 우리의 신조로 한다고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개의 목사들이 그 교리에 충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감독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정식으로 선포되는 메시지, 그것을 보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잘못되면 그 교회의 유인물이 어떠하든, 그 교회가 어떤 교단에 들어있든 그 교회는 참 교회일 수 없습니다. 참된 교회인지 확인하려면 교회의 설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바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종교 개혁은 설교 개혁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근본적으로 예배 개혁입니다. 그리하여 미사라고 하는 죽음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의 예배로의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의 개혁을 이루어 가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 설교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없이는 종교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설교 없이는 오늘 우리 교회도 바르게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현 시대에는 설교를 높이는 것을 꺼려하는 시대의 조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 조류가 우리나라의 한글 번역 성경에도 반영이 된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변개하는 시대가 다가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말씀의 선포를 이토록 엄중한 권세로서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시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시대가 지금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말씀 자체가 변개될 수 있는 심각한 시대가 다가오게 될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항상 힘쓰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에피스테미”인데 이 말은 “‘준비하다”를 의미합니다. 지금 어떤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상극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앞두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이제까지 하던 대로 변함없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다가오는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시대가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따르는 시대가 다가올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따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가 가진 뜻에 맞는가를 물을 것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즉 진리의 말씀이, 바른 교훈보다는 자기 마음에 맞는 교훈을 듣고 싶어서 온갖 것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 귀에 맞는 소리만 듣고 찾아다니려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도 역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1절). 저는 청년 시절에 이 말씀을 읽을 때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는 고난의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말세의 고통하는 때는 반드시 고난과 핍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 자체를 말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임할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핍박일까요?, 환란일까요? 아닙니다. 진리를 거역하는 시대 상황이 바로 고통입니다. 계속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바로 이것이 시대 상황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시대 조류가 밀려온다

교회가 배교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들이, 장로님들이 그 일을 용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목사님도 배교할 수 있고 장로님도 배교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배교하지 않습니다. 모두 교단 헌법을 준수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과 행실은 전혀 그 교훈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대한 조류가 되는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습은 한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5절).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올바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속에 있는 것은 증명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증명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리는 그가 입으로는 다 맞는 말을 하지만 속은 어떤지 모르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가 말세이며, 그 시대는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고통이 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함으로 두려움 없이 대적하라

그런 시대가 다가올 때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시대 앞에서 목회자는 어떤 각오를 가져야 할까요? 시대의 조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포기할까요? 아니면 그냥 멀리 도망갈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조류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 시대의 조류보다 더 두려워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시대의 권세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시대의 조류에 대항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디모데 목사에게 엄숙하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준비하라.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경책하고 바르게 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르치는데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이 말이 유독 마음에 다가옵니다. 사실 말씀을 가르칠 때 오래 참지 않으면 말씀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는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말씀을 가르칠 때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권면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사역했다고 하면서 에베소 사역에서 가장 강조된 것이 “모든 인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참고 경책하라

더 나아가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합니다. 즉 “경책”하는 것입니다. 3장을 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6절). 이것은 가정 심방을 하면서 엉뚱한 교훈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이것은 잘못된 교훈에 미혹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7절). 결국 그들은 바른 교훈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 때문에 잘못된 교훈에 빠져들어갑니다. 그들은 결국 진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얀네와 얌브레가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유대인의 다른 서적에서 등장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세를 대적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라고 하는 인격체를 대적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즉 말씀을 대적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따르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일들은 분명하게 경책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따르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엄중한 것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통치 방법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설교는 교회가 진리 위에 섰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리를 따른다고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메시지가 변질되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의 특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말씀의 선포와 말씀의 참된 의미들은 변개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말씀에 참된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고, 선포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거역하는 이 거대한 물줄기 가운데 진리를 굳게 세우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워지고 그 물줄기를 이겨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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