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13)_공동체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다 (고전 14: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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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7-05본문
영적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13)
공동체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다 (고전 14:26-13)
교회의 혼란에 대한 사도의 교훈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은사의 활용에 대하여 여러 혼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 중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은사가 많았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은사를 자랑하고, 은사를 과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2장부터 은사에 대하여 교훈을 하면서 은사는 여러 가지만 은사를 주신 성령은 한 분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은사를 주신 성령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한 분에 의하여 은사는 통일성 있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사의 사용은 자신을 빛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가장 좋은 길을 일러주겠다고 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가 하나 되는 원리로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4장에서 그는 “사랑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활용할 때 사랑을 추구하라. 교회를 섬길 때 사랑을 추구하라. “사랑을 추구하라”는 다른 말로는 “덕을 세우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면 방언의 은사로서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자기를 빛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덕을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방언의 내용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을 하라고 것입니다.
방언의 예
성경을 보면 최초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은 각 나라 말로 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전에 가서도 여전히 방어를 했는데 거기에 14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러나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나라 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하게 이런 일들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시대에 가서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고 해서 모두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임스 패커는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방언 통역을 실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녹음한 다음 방언 통역하는 사람들에게 녹음한 방언을 들려주면서 통역을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이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면 방언통역의 결과도 똑같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팩커의 실험에 의하면 다 다르게 나왔습니다. 과연 현대의 방언이나 통역이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패커는 방언통역은 우리가 외국어 통역하듯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면 방언통역이 설교와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요? 방언과 방언통역이 설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직접 우리한테 말씀하신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설교자는 자신이 배운 것을 가지고 연구해서 설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준비하는 설교는 성령이 직접 주시는 방언의 말씀보다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과 통역하는 말들은 설교보다 더 깊은 진리를 담고 있거나 설교보다 더 체계적이고 준비된 언어로 정돈되어 선포되지 못합니다. 방언과 통역은 성령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확신할 수 없는 인상만 줄 뿐입니다. 즉 잘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이 기도 가운데 그가 받은 말씀들을 잘 정리하여 전하는 설교보다 탁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 교회를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가르침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26절). 여기 가르치는 말씀은 설교를 의미합니다. 예배에는 가르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말씀과 더불어 선지자에게 임하는 예언이나 방언의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그 시대의 특징이었습니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질서 있게 행하라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을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질서 있게 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유익을 주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은혜롭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방언을 통역하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방언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참된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고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는 것은 참된 말씀 사역이 아닙니다. 말씀 사역의 목표는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1600년의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렇게 모아주셨을까요?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말씀을 주신 목적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결코 알지 못하는 말로 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알지 못하는 말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알지 못하는 말씀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둥소리는 두렵고 떨리는 감정은 일으키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 이적만으로 행사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이 아무리 대단한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믿음의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교회에서는 아예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혼자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에는 가르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있어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고 성도들의 믿음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조정해야 한다
또한 방언을 행할 때에도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방언을 하겠다고 나선다고 모두 시키면 안 됩니다. 두 명, 많으면 세 명 정도만 해야 합니다. 예언도 마찬가지로 두 명, 많으면 세 명으로 끊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왔다고 하면 지금 말하던 사람은 중단시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절). 우리는 흔히 성령이 역사하면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질서를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3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즉 성령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즉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시지만 내가 나의 정신으로 이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여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이 역사할 때에라도 우리가 바른 정신을 가지고 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할 수 없고 어떻게 막을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성령이 역사할 때라도 항상 자신의 마음을 추스려서 예배를 전체적으로 은혜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중요한 원리는 무엇입니까? 질서입니다. 32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성령의 역사는 컨트롤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감동을 마음에서 정돈하여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배 속에서 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에 적용된 대원칙입니다. 즉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공동체 안에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질서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직분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 직분의 질서는 교회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질서”는 영어의 order인데, 이 말이 교회의 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초 화란의 도르트회의입니다. 화란교회는 그 당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기한 항론에 대하여 신조를 작성하여 그 잘못된 주장들을 배격하고,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Order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후대에 교회 헌법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헌법은 교회의 직분 체계와 회의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되 그들의 책임과 한계를 정하고, 교회 회의를 통해 교회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는 집회의 질서가 있습니다. 즉 예배의 질서가 있습니다. 예배의 질서를 규정하는 것은 예배 모범입니다. 예배 모범에는 각종 집회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 주일학교 예배, 기도회 등의 모임들에 대하여 순서와 순서들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를 진행할 때에는 누가 필수적으로 참석하여 그 예배를 지도해야 할지 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질서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질서를 규정하는 규범들을 가지고 있는데 헌법이 그것이고 예배 모범이 그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권징을 행하게 되어 있는데, 권징에 대하여도 규정이 따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권징조례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교회의 덕, 즉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모든 성도들이 기쁨으로 이 교회를 섬기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갈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행하라
한편 교회에는 규정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공중도덕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르치면 너무 쩨쩨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시설 관리 문제나 이용 문제는 사실 공중도덕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 있는데, 이런 부분을 안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면 교회가 이런 것까지 가르치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들이 교회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배려하고 살펴서 행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령 1층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데 사용하고 일어날 때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원위치 시켜서 다른 누군가가 다시 의자를 정리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규정으로 만드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규정으로 지키면 좋은 것입니다. 또한 사용하고 일어난 자리에 쓰레기가 있거나 음식물 찌꺼기가 묻었으면 그것을 닦아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두고 일어나면 누군가가 와서 다시 손을 대야 합니다. 과자 부스러기들을 그냥 놓고 간다든지, 주보 같은 것을 떨어뜨려놓고 간다든지 하는 것들은 공중도덕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공종도덕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 시설을 이용할 때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이용한 다음에는 내가 뒷정리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만 가지면 교회 시설을 이용할 때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오히려 “이 교회는 정말 수준 있는 교회네” 하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 한마디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말도 절제하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순종하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뒷정리도 합니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이 말은 우리가 늘 사용해야 되는 만능어 입니다. 교회에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질서와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 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도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기 위하여 우리가 꼭 세워야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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