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종교개혁의 메시지(9)_오직 은혜 ① (엡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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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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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메시지(9)

오직 은혜 ①  (엡 2:1-7)


오직 은혜

오늘은 종교 개혁의 메시지 오직 은혜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하겠습니다. 오직 은혜는 ‘솔라 그라티아’라는 라틴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솔라’라는 말은 ‘오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솔라 그라티아’는 ‘오직 은혜, 오직 은혜만으로’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왜 오직 은혜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가 되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믿음의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의 주장들이 있고 교회의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왜곡된 가르침이 결국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던 겁니다. 성경을 보면은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

2장 1절 말씀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것이다’가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존재를 다시 살리신 것이 구원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살리셨도다’라는 말은 성경 원문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분문에 인쇄된 글자를 보면 다른 글자보다 작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데 번역자가 문맥상 넣은 것입니다. 저는 한글 성경 번역자들이 여기서 너무 많이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너희는 그때에 그 가운데에서 행하여’ ‘살리셨도다’라는 말은 뒤에 다시 나옵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간혹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표 기도할 때 ‘죄로 죽을 우리’라고 기도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내가 안 죽었고 안 죽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죄로 죽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꽃꽂이해 놓은 꽃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예쁘고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한 일주일 정도 있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꽃꽂이한 꽃은 뿌리가 없는 존재이기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없는 이 꽃은 그저 며칠 반짝하고 결국은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상황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던 말씀대로 아담에게 임했던 것은 죄와 허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이미 그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육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이 있지만 이미 생명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잘려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꽃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얼마 후에는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몇 년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의 뿌리의 회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접붙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접붙임은 뿌리가 없는 나무 줄기를 뿌리가 있는 나무에다 갖다가 붙여 놓는 것입니다. 생명의 뿌리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접붙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명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이제는 생명의 뿌리를 얻게 되는 사건. 즉 구원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뿌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을까요? 이것이 2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서, 즉 생명의 뿌리가 없는 상황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이 세상 풍조는 이 세대의 죄악된,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흐름을 따라 갔습니다. 강은 흘러가는 흐름이 있습니다. 바다조차도 알고 보면 흐름이 있습니다. 바닷물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류 또는 해류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도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 속에 휩쓸려가는 삶. 그것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흐름을 벗어난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며 살아왔었던 것 자체가 사실은 흐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흐름 주도하고 있는 존재는 사탄입니다. 3절을 보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진노의 자녀였는데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사함을 얻게 되었고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긍휼과 큰 사랑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일까요? 4절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은 어디였을까요? 풍조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흐르고 있는 이 세상의 풍조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을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5절, ‘허물러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은혜는 사랑입니다. 은혜는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지극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었습니까? 나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고, 이 세상 풍조 속에 잠겨 이 흐름을 주도하는 악한 영의 주도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흐름 속에 마음을 다하여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정욕’이라고 부르는, 즉 육체의 갈망을 따라 사탄이 주도하는 흐름 속에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그 흐름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조 속에서, 그 죄의 해류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이 큰 사랑을 베풀어 그를 이렇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자리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는 사명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7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게 나타내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제부터 오는 여러 세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총 집합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종합판입니다. 학생 시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우면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웠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나의 삶의 목표로 세워놓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도대체 무얼까? 그래서 이 영광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날 영광은 어떤 존재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즉 그 존재가 그 존재일 수밖에 없는 탁월함 바로 그것이 영광이라고 설명하는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서 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양한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존재와 지혜와 지혜와 권세와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심이 영원하고 무한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재벌의 영광은 그 부에 달려 있고, 군인의 영광은 그 계급에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나타내는 탁월하신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군인의 영광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장군의 차에 부착하는 별판입니다. 또는 열병식과 같은 예식에서 표현하는 영광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 그 존재의 영원무궁함 속에, 그 지혜 속에, 권세 속에, 하나님의 진실하심 속에, 사랑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이 영광이 총집결되어 종합적으로 다 모여서 한꺼번에 아름답고 찬란하게 나타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 있고, 그분의 지혜와 권세와 거룩하심도 은혜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분의 공의와 진실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과 이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심지어는 영원과 무궁까지도 다 이 은혜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총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총 집합체를 발견합니다.


'솔라 그라티아'의 영광을 받으시는 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집합체가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세 교회가 이것을 상실했습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의 집합체인 이 은혜의 영광을 상실한 신학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사람이 대신 받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에 별판을 단 장군의 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차에 그 장군님의 아들이 탔습니다. 그런데 별판 덮개를 떼고 다녔습니다. 장군님은 안 타고 누가 탔다고요? 아들이 탔습니다. 이렇게 해도 될까요? 안 됩니다. ‘난 장군의 아들인데?’ 예. 안 됩니다. 오직 누구만 될까요? 장군님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영광을 받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대신 받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교황입니다.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집약체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변개시킨다든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모든 영광을 대신 받는 상황이 교황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황의 명칭 가운데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는 명칭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신 받는 대리자일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 개혁은 이와 같은 잘못된 신학과 잘못된 관습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모토를 통해 이 운동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한 것은 ‘솔라 그라티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집약체이므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영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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