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3)_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호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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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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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3)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호 6:1-3)



번영 속에 감추어진 멸망의 전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으나,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고 방종의 길을 걷던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이 메시지를 전한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8세기 중엽(700년대 중엽),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황금기에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동시대 남유다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찢어지는 가슴을 대언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남쪽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은 유다 왕국이었고, 북쪽은 여로보암 1세가 세운 북이스라엘 왕국이었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절,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시대를 일구어낸 능력 있는 군주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축복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영토가 넓어지고 창고가 가득 차니, 우리는 분명 하나님께 사랑받는 백성이다"라는 자신감이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 화려한 겉모습 너머에 있는 영적 부패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 번영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불과 수십 년 안에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의 사역이 끝난 지 약 30~50년 만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무엇이 이 부강한 나라를 그토록 빠르게 무너뜨렸을까요? 그 해답은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지식의 부재'에 있습니다.


찢으시고 싸매시는 하나님

호세아 6장 1절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장엄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이 선포는 단순히 위치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다시 고정하라는 결단 촉구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번영을 누리던 백성들에게 이 말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나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다고 하는가?" 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들은 이미 내부적으로 찢겨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찢기고, 우상숭배로 인해 정체성이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찢으시는 이유는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곪아 터진 환부를 도려내기 위함입니다. 수술대 위에 오른 환자에게 칼을 대는 의사는 환자를 미워해서 찢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 찢는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2절에서는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틀 후', '셋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이 지체되지 않고 신속하게 임할 것임을 뜻하는 관용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단숨에 우리를 회복시키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이 약속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삼 일 만의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를 단번에 생명의 자리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아야 합니다.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멸망의 길을 걸었을까요? 호세아 선지자는 그 원인을 명확하게 지목합니다. 바로 '지식의 부재'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정보의 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 경제, 군사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 인생은 모래 위에 지은 성과 같습니다. 특히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는 말씀은 신앙의 전수가 끊어질 때 한 민족이 겪게 될 가장 비극적인 몰락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몰락은 곧 국가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에게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근거이지만, 당장의 사업 성공과 자녀 교육, 건강의 복은 우상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영적 음행'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고, 번영을 우연이나 자신의 노력, 혹은 이방 신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그것이 바로 '지식을 버린 결과'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 — 제대로 된 지식의 회복

그렇다면 호세아가 그토록 강조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어떤 것일까요? 6장 3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권면합니다.

'힘써'라는 단어는 단순히 노력하라는 뜻을 넘어, 우리 존재의 모든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깨닫는 것에 두라는 강력한 강조입니다. "제대로 알자", "대충 알지 말고 깊이 알자"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 취미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지성적인 동의를 넘어선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명제들을 나열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품에 압도당하고, 그분의 사랑에 가슴 적셔본 경험이 바로 참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예배와 삶이 정상화됩니다.


신학적 고찰 — 존 칼빈의 통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1권 1장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인간)을 아는 지식'입니다. 칼빈은 이 두 지식이 서로 거울처럼 비춘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무한함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동시에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제대로 알면: 자신의 무능함과 유한함을 절감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지적 사색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가장 실천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닙니다. 장로교 신앙의 기초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속성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이를 기억하기 쉽게 요약하면 **'존지권고 공인진사'**라는 여덟 글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존재): 스스로 계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분.

지(지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는 완벽한 계획을 가지신 분.

권(권능): 말씀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함.

고(거룩): 죄와 구별된 완전하고 찬란한 순결함.

공(공의):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분.

인(인자): 죄인을 향해 오래 참으시고 한결같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진(진실): 변함없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성실함.

사(사랑): 독생자까지 내어주시는 무한하고 희생적인 사랑.

이러한 속성들은 단순히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한 정보가 아닙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가 내 마음속에 살아 움직일 때,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자세가 나옵니다.


참된 경건의 두 기둥 — 두려움과 사랑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 거룩한 감정이 공존합니다. 바로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과 거룩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방자하게 행합니다. 왜 예배가 지루하고 기도가 형식적이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압도당하여 함부로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삶 속에서도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유지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두려움만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겠지만,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사랑만 있다면 하나님을 우습게 보겠지만, 두려움이 있기에 우리는 떨림으로 그분을 즐거워합니다. 이 두 기둥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신앙은 '경외'라는 이름의 참된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하나님의 영광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라는 글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궁극적인 이유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최고로 가치 있는 분이시기에 당연한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속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된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빛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2026년,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의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202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북이스라엘이 풍요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걸었듯, 현대 사회 역시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 정도로만 알거나, 혹은 내 삶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방관자로 아는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건강, 직장, 자녀, 평안한 일상...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히 온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탁월한 노력 때문입니까? 호세아는 외칩니다. "아니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지로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마음속에서 두려움과 사랑으로 꽃피울 때, 우리는 비로소 예배의 기쁨을 회복하고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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