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종교개혁의 메시지(7)_오직 믿음 ③ (갈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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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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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메시지(7)

오직 믿음 ( 2:15-21)

 

 

 

교회는 선언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다

트렌트 공의회라는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총회에서 여러 결정이 있었고, 이는 로마 교황이 선포한 최종 권위였기에, 이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어졌습니다.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로마 가톨릭이 한자리에서 '우리는 다르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선언만으로 다른 것이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는 합의된 바가 없는데 서둘러 발표했다는 이야기가 사실 속사정일 것입니다. 같을 수 없는 내용을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겉으로만 '일단 하나'라고 선언하자는 식으로 나아가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언이 급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리의 내용들을 살펴보고 진리가 하나 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하나 되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진리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다른데 어떻게 한 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선언이 급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리가 하나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의 새로운 도전

오늘은 종교 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의 내용을 바꿔치기하여 종교 개혁의 정신이 사라지게 만드는 현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도전이 아니라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 도전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서로 남이라는 생각이 있어 그들의 말에 사람들이 아닐 거라는 심정을 가지고 듣지만, 개신교 내부에서, 그것도 세계 최고의 학자라고 인정받는 사람들 가운데 주장이 되었다면 굉장히 심각한 일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크게 세를 얻어가는 또 하나의 현대 사상이 있는데, 이 사상은 1980년대에 등장하여 벌써 40년 정도 된 '바울에 대한 세 관점'이라고 하는 신학 사조입니다. 이 사조는 파도처럼 한 방향을 향하여 신학자들이 계속 등장하고, 그 신학에 물든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는 상황이기에 사조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가 물들어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깨닫고 이 부분을 연구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새 관점'은 바울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신학계의 흐름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한 묶음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은 별개의 사상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이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신학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님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유대주의 입장에서 신학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그리스 철학의 기반으로 새롭게 만든 사람이 바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기독교의 창시자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철학적인 용어이며, 사상적으로는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견해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이나 같다고 생각하고, 바울식 기독교가 되었다는 현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현대 신학 속에 꾸준히 존재하며 세를 불려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의 등장과 주장

이런 현대 신학을 주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새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발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고 유대의 랍비로서, 그리스 철학으로 기독교를 바꾼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유대인이고 유대 사상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 바울을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기독교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사상으로 헬라 철학과 상관이 없는 기독교를 주장한 사람이라고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면서 결국 이것도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바울은 유대인 랍비이고 기독교는 갱신된 유대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다면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로서 존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전혀 새로운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로서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될 모든 일을 다 감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메시아였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메시아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후에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만류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관념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방 민족의 통치를 끝장내고 유대인의 나라를 회복할 독립운동가로서의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여전히 이 전통적인 메시아 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메시아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어야 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인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예수님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분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 나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인식이 철저하여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야 성령의 역사 속에 이방인을 향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져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인에게만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코넬료의 집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더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성령이 임하셨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유대인에 갇혀 있는 초대 교회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은 아직 유대인으로서의 인식이 강하여 온 세계 만민을 향한 복음을 도무지 마음속에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환상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안디옥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 교회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방인 교회에 와서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유대인의 한계 속에 갇힌 내용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서 저주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를 부인하는 행위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여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 즉 베드로, 바나바, 사도 바울 등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로 베드로를 공격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던 것 아니냐?" "그래서 이방인들과도 한자리에서 같이 식사하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 아니냐?" 식사 자리에서 다른 유대인들 눈치를 보고 피한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들과 한 형제가 되었는데, 어떤 유대제일주의자들에게 '너도 이방인 죄인들과 함께하느냐'라는 공격을 당하는 것이 싫어서 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 우리가 이방 죄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롭게 된 자는 다른 극단주의 유대인들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이런 모욕과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도리를 숨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기독교를 전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새로운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도리에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하나 된 믿음을 부인하는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믿음을 말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사명을 받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죄인으로 여기고 상종하지 않을 자로 여겼던 바울은 평생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돈 버는 일은 하지만 먹는 것과 기타 모든 일은 자기들끼리만 하는 것이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철저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회심시키실 때 만나자마자 하신 말씀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믿음의 원칙과 정반대되는 사명이 예수님께로부터 주어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백성들을, 즉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워 놓으셨고,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만났을 때, 사도들은 그의 신학적인 견해와 입장을 확인했습니다. 사도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달랐으면 처음부터 갈라졌을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를 보호하고 고향 다소로 보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는 16절 말씀의 배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기독교를 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새로운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념과 다른 메시아를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메시아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정리하여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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