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우리에게서 영혼구원의 역사가 그친다면(2)_왜 영혼구원이 필요한가? (롬 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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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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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서 영혼구원의 역사가 그친다면(2)

왜 영혼구원이 필요한가? (롬 3:9-18)


왜 구원이 필요한가

지난주에 우리는 현재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혼 구원에 있으며 영혼 구원의 문제를 우리의 눈으로부터 덮어 가리우고자 하는 사탄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과연 영혼 구원이 왜 시급한 것일까요?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까?


첫째 인간의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아름다움이 지상의 어떤 존재보다 탁월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아름다움만큼 덧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말씀하기를 인간의 아름다움은 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꽃은 시들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에도 인간이 언제나 시드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완전합니다. 노화가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변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질병이 있습니다. 노화와 질병이 함께 합쳐지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됩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인간의 삶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고비가 있고 가지가지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 혹은 재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점점 발전하는 것 같지만 고비 고비마다 문제가 있어 꺾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세가 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연세가 들면 경제 활동으로부터 물러나야 하고, 경제 활동에서 물러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경제적으로, 건강적으로 참 힘들고 어려운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노후를 준비한다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한편 인간 사회는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누구는 금수저로 태어나고, 누구는 흙수저로 태어나고, 누구는 아예 흑수저조차도 되지 못합니다. 저도 이만큼 되기까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마는, 그러나 경제적으로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대단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금수저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금도금도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살면서 마음속에는 ‘좋다. 그렇다면 나는 실력을 키워야겠다.’ 하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마음을 가졌다 해도 성공하기 힘듭니다. 옛날에는 ‘ 너는 그렇게 어려운데도 노력을 해서 이만한 성취를 이루었으니 너 참 대단하다’라고 인정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너는 도저히 못 쫓아와’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개천에서는 지렁이밖에 안 난다’ 고 말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불공평한 상황이 고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은 인간 사회는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도덕이라고 하는, 즉 선이라고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이 선이 참되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선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선을 부인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선이라고 부르던 것은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현대 사상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던 모든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제는 그와 상관없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내가 좋으냐? 내가 편하냐? 내가 많이 얻을 수 있느냐? 내가 내 생각이 옳으냐? 이것이 절대 기준이 되어 가는 시대, 즉 극단적인 상대성의 시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들이 실패하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주 왕성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산업혁명 이후에 어린 아이들이 노동에 동원되거나 아니면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 버려지는 이러한 문제들을 인식을 하고 이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후로 한 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 문제는 얼마나 개선되었을까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많이 개선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전 세계적으로 보면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UN, 즉 국제연합이 세워지고, 각종 NGO, 즉 비영리 봉사 단체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선되었을까요? 20세기에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이와 같은 불안정, 혹은 불공평, 부도덕, 이런 문제들은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의 잘못이라고 하는 사상이 점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책임을 사회 구조에 돌리고 사회 구조를 무너뜨리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사회 구조를 무너뜨린 사람들은 또 다른 구조를 만들 수밖에 없고, 또 다른 구조는 자기 편을 이롭게 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어서, 다른 세력이 기존 세력을 대체하는 효과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 활동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이 20세기의 결론입니다.


왜 인간의 활동이 성공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원인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결핍과 불안과 착취와 억압과 불행의 원인을 진지하게, 그 원인을 진정으로 다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원인을 초기에는 이것을 인간 개인의 문제로 봤습니다. 네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네가 생각이 잘못돼서 그런 거야. 네가 바르게 살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그때의 처방은 인간의 개인적인 심성과 생활 태도의 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등장한 것이 구조의 문제였습니다. 사회의 문제는 교육이 일부에게 독점되었기 때문이니 교육의 한계를 깨뜨려서 교육의 기회를 골고루 나누어주자. 그리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어떤 방면의 개혁이 있다 할지라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넘어서는 공교한 수단들을 개발해 내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교육의 기회가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외를 시키지요. 어떤 사람들은 몇 백 만원대의 가정교사를 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또다시 격차를 만들어냅니다. 대학 입학에서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수시 입학에서 특권층끼리의 나눠먹기, 경력 밀어주기 등, 수시 입학 제도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시 입학 제도를 이용을 해서 교육 기회, 대학 입학의 기회를 독점하는 잘못된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절망적이고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 세상의 불안정과 불평등, 부도덕 등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개인의 잘못에 있을까요? 아니면 구조에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죄의 문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답을 합니다.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라는 표현은 ‘모든 인류’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류는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참되게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된 상황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악된 상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깨달음이 없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불완전과 불안정, 그리고 부도덕과 불공평 가운데 살아가게 된 이유는 죄의 문제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죄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이 죄를 개인의 도덕적인, 또는 법적인 죄로 생각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 죄를 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도를 바꾸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어 좀 나아지셨습니까? 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 죄입니다. 그 죄로부터 이 땅의 모든 불안전과 불공평과 부도덕과 그리고 모든 불완전이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죄와 그 비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죄와 그 비참이 인간의 삶에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왜 영혼 구원인가?

저는 이번 한 주일 동안 ‘영혼 구원’이라는 단어를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왜 영혼 구원일까? 그냥 구원이라고 말하면 안 될까? 영혼 구원은 소울(soul)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영혼, 또는 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단순히 인간을 가리키는 비유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은 ‘인간 구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영혼의 구원이 근본적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종교 철학,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론 같은 것들을 보면 육체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육체는 버림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버리기 위하여 고행과 금욕 등을 행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부인해야 영혼이 순결하게 되고 영혼의 참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를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된 영혼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에 육체까지 새로워져서 온전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여 육체의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구원을 1차 구원의 목표로 삼지 아니하고, 영혼 구원을 1차 구원의 대상으로 삼되,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완성되는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고 그 완전한 구원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 받은 이 비밀을 통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었고, 이제는 육체의 완성을 통해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이 완성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큰 부자를 볼 때 우리는 ‘저 사람은 걱정도 없고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 세상은 영적인 좌절과 절망, 그리고 멸망으로 향해가고 있는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구원이 있어야만 참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것들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영혼 구원을 놓치고 있을까요? 우리의 눈이 영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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