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신 그리스도(3)_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말라(사 53:3)
페이지 정보
작성일2025-04-11본문
승리하신 그리스도(3)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말라(사 53:3)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반응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또 열매를 맺지 못하여 낙심케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시대의 뚜렷한 징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이 인간의 본질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동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에 대한 성경의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몇 가지 용어로 그들이 거치는 모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어는 ‘멸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학력을 자랑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기의 집안까지도 자랑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양반 후손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나라 조선시대 중기에 70%가 노비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양반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데 뭔가 자부심을 가지고 젠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모두 적나라하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릴 때 애굽으로 피신하고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는데 내놓을 만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거슬러 올라가서 다윗 왕의 후손이라고는 하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윗대에 행세하는 사람 하나 없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라고 해도 알고 보면 그 정통성을 유지하고 그 영광을 유지한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랍비로서 이름난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그는 ‘연한 순’이었고,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리스도는 나보다 나을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은 ‘버렸다’ 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버렸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베푼 일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분은 병자들이 당신에게 찾아오면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밤늦게라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지, 식사할 틈도 없고 잠드실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병든 자들을 위해 격무에 시달리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세 번째 사람들의 반응은 ‘얼굴을 가림’이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얼굴을 가린 것, 이것은 외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른 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어려울 때에는, 자기들이 고통스러울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들이 필요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이 아파할 때 그 아픔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심지어 자녀를 잃은 홀로 남은 어머니의 아픔과 고통의 자리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우리 주님께서 고통 당하시던 순간과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지금이라고 유독 더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지금이나 사람은 동일합니다. 그때에도 사람은 죄인이었고, 그때에도 사람은 정욕에 빠졌었고, 그때에도 사람들은 탐욕에 빠져 자기만을 살피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백성의 반응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그들의 반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반응이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절). 여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거나, 버리거나, 혹은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많은 일들이 있고 그중에 그리스도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멸시한 것은 아닙니다.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타락된 본성을 가진 채 죄의 오염과 부패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의 원리가 변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무죄 상태의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원리, 즉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타락하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을 때, 이 마음의 원리가 바뀝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외면하고, 거룩한 일들과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관된 마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일관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예를 들면 오뚜기 같은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오뚜기는 넘어뜨리면 다시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다시 일어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뚜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입니다. 속에서 딸그락 딸그락 소리만 나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언제나 오뚜기를 일어나게 만드는 부분이 고장이 난 것입니다. 오뚜기 속에는 작은 쇠붙이가 바닥에 붙여져 있습니다. 떨어진 쇠붙이를 접착제로 붙였더니 다시 빨딱빨딱 일어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마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특성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이 마음의 원리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 속에 생명이 있는데 이 말씀이 곧 빛이라고 말씀하면서, 이 빛이 세상에, 자기 백성에게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여 빛을 외면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외면했을 때, 즉 빛을 싫어하여 어둠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의 일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연합하고, 이들에 의해 선동된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메시아를 죽이고자 하였고, 마침내 로마 군병의 손을 빌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의 신앙만이 살 길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상황일까요? 우리들은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들을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루터가 주장했었던 하나의 사상이 있는데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입니다. ‘영광의 신학’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있는 교회의 영광으로 대치시킨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의 영광, 즉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들수록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있는 교회의 영광으로 치환시킨 겁니다. 교회가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한 교회는 언제나 교회 건물과 성직자들의 화려함에 모든 자원을 투자합니다. 그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무지한 상태로 만들어놓고 하라는 대로 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광의 신학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화려하게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이었을까요?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었을까요? 개혁자들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말씀의 참된 선포에서 찾았으며, 성례의 정당한 집행에서 찾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정한 교회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 인간의 손으로 꾸미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리와 생명으로부터 찾았던 것입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교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헌신과 겸손과 희생을 실천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뢰에는 십자가의 정신이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것은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음까지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겸손과 이 희생,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드리는 이와 같은 마음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고 교회당 건물에 많은 돈을 들이면 뭔가 될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건물을 보고 감탄합니다. 야 이거 하는데 얼마 들었어? 너 참 대단하다. 저는 겨우 몇 년 전에 이제 한 3년째 됩니다마는 리모델링 조금 해놓고 늘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에 이만큼 돈을 썼습니다. 늘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뭐 예쁘다 잘했다 뭐 말씀들 해요 그러면은 거기에 대놓고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그러나 저의 마음 한쪽에는 항상 죄스러움이 있습니다. 이거는 교회를 무슨 영광스럽게 꾸미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살던 집 그냥 보수하듯 그런 개념으로 한 겁니다. 무슨 엄청난 화려함 이건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송함이 있어요. 주님, 이 교회를 사용하시되 우선 우리가 한 이 자그마한 일이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생명을 사용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세상이 새로워진다
교회에는 영광의 신앙이 아닌 십자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번듯한 교회, 세상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얼마나 과시하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생명을 상실하고 능력을 상실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흑화(黑化되)되어 갈 뿐입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 시대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를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종교 개혁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즉 그리스도의 참된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혹은 교회 건물을 꾸미는데 많은 재원을 드리고 그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십자가의 생명을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의 정신으로 섬기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시대에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겁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위하여,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둠에 덮였으나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거부하던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온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참되게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며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