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트립의 메시지(1)_비텐베르크 : 참 진리의 회복(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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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8본문
비전트립의 메시지(1)
비텐베르크 : 참 진리의 회복(갈 1:6-10)
비전트립의 메시지
우리가 금년에 계획한 일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비전트립 이제 49일 앞으로 왔습니다. 오늘부터 비전 트립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가서 보게 될 도시들 가운데 몇 개의 도시를 선택해서 그 도시에 담겨 있는 종교 개혁의 의미, 또 그와 관련된 인물의 전기적 사건, 하나님의 크신 섭리 등을 “비전 트립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서 비텐베르크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라고 하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논문을 비텐베르크 성 대학 입구에 붙이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순식간에 인쇄되어 짧은 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배후에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자 인쇄술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논문을 사서 읽고 루터의 주장들에 공감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때를 예비하신 것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교통과 상업 등 모든 분야가 발달했고,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어 인쇄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예수님 당대처럼 종교개혁 당시 유럽도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각 나라마다 자기의 고유 언어가 있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공통 언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라틴어입니다. 종교개혁 시대는 종교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많은 기본 바탕들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준비를 갖춰 놓으시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비텐베르크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5개조로 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의 내용은 그 당시 로마 교황이 판매한 면죄부를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오늘날 로마의 바티칸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용도로 면죄부를 판매하였는데 이 문제를 95개조 논문에서 반박했던 것입니다. 95개 조는 논문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 논문 쓰는 방식은 소위 Article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법조문과 같습니다. 로터는 95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 논문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 논문은 학문적인 용도로서 작성되었고, 신학적인 논쟁을 통하여 교회를 바르게 하자는 의도로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건전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억압만 오다가 결국에는 이 종교 개혁의 길로 가게 된 겁니다. 그러면 비텐베르크성 대학 정문에 부착되었던 95개조 논문의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당시 로마 교황청은 독일 지역에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 떼첼이라고 하는 사람을 판매자로 세웠습니다. 떼첼은 독일 각지를 다니면서 설교를 통해 면죄부 판매를 독려하고 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면죄부를 사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루터는 이 일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면 순종해야 하겠죠. 그러나 루터가 깨달은 복음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루터가 깨닫게 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면죄부 판매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비성경적인 악습으로 규정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95개조 논문 개요(1) 참된 회개에 대해
루터는 95개조 논문에서 어떻게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논증했을까요? 1조부터 4조 까지는 참된 회개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회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회개는 내적 회개와 외적 회개가 있습니다다. 참된 회개는 외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회개에 합당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됩니다. 그리고 회개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고 나서 교황이 가진 사죄의 권세가 헛되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교황이 일반적으로, 즉 모든 사람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사죄권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바로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엄청난 내용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교황을 신성시했고, 그를 지상 최고의 권세자요, 영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그런 시대에 교황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95개조 논문 개요(2)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루터는 죄 용서의 문제,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8항부터 29항에서 죽어서 연옥에 있는 자의 사죄의 문제(루터가 연옥을 믿었을까? 이 당시에는 연옥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는 루터가 진리의 길을 바로 가기 때문에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9항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속죄의 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그 법에 따라, 즉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속죄가 미치기 때문에 죽은 자의 죄가 사하여 질 수는 없다. 죽은 자들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 법적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한 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게 되었는데, 그런데도 연옥에 가서 사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하고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교회법에 관한 한 이미 죽었으며 그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갖고 있다.” 로마 교회의 관할 하에 있는 사람의 죄라 할지라도 죽으면 더 이상 로마 교회 관할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로마 교회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에 대해 그 죄를 추궁하고 그 죄를 용서해 줄테니 면죄부를 사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이 공과의 영역 밖에 있는지 즉 사랑을 더 입을 수 없는지의 여부는 이성으로도 성경을 통해서도 입증되지 않는 것 같다.” 즉 연옥에 있는 영혼, 즉 죽은 사람이 그의 영혼의 연옥에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무슨 공이 있거나 과가 있거나 하는 식으로 그의 공과를 결정하고 하는 일이 이성적으로도 가능하지 않고 성경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그는 20절에서 한 번 더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형벌의 무조건적인 사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실제로 모든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할 수 있는 형벌에 국한되는 것이다.” 지금은 로마 교황이 면죄부를 포기했을까요? 오늘날 로마 카톨릭은 면죄부 교리가 없을까요? 제가 2천년대 초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란 것은 그 당시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 자기 고향 마을을 방문하는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면죄부를 발행한다는 신문 기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95개조 논문 개요(3) 살아 있는 자의 사죄에 대해
계속해서 루터는 산 자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살아 있는 자의 사면 문제에 대해 32항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면죄부를 산 것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이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면죄부를 샀기 때문에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저주를 받을 것이고, 그것을 배워서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저는 이 조항을 읽을 때 갈라디아서 1장의 사도 바울의 태도가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을 쉽게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노라’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부임해서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속해서 강의하면서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구원의 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깨달은 이 진리로 볼 때 면죄부의 주장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36항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37항,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든 죽었든 그리스도인의 모든 축복과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는 면죄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된다.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면서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95개조 논문 개요(4)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라
그다음 면죄부 판매를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이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이란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다.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다.” 56항 이하에는 면죄부 판매의 근거에 대한 반박이 있습니다. 로마 교황이 면죄부 제도를 주장하는 근거는 성자들의 “여덕”입니다. 성자들은 일반 성도들과 달리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로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로들을 따로 모아 창고 안에 넣어두셨는데 이 창고 관리 열쇠를 교황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면죄부는 바로 성인들이 모아놓은 공로를 교황이 권세로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57항, “면죄부가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많은 면죄부 판매자들이 이를 마음대로 나누어주기보다는 이를 긁어모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보물 창고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겉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62항에서 “교회의 진정한 보물 창고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증언이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복음이 보물 창고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음 외에 무엇이 보물 창고입니까? 그다음 67항 이하부터는 면죄부가 주장하는 사죄의 논리는 헛되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신앙에 비교해 볼 때 가장 무의미한 은혜에 불과하다. 면죄부를 과대평가하여 인간이 아무리 못한 짓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어머니를 범했다 할지라도 면죄부가 그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의 주장은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81항부터 91항까지 면죄부 판매를 옹호하는 세간의 여러 가지 주장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논박을 합니다. 그다음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면을 하면서 논문을 마감합니다.
계속되어야 하는 참 진리의 회복
실로 95개조 논문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한 편의 논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논문에서 다룬 것은 참된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효력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우리의 죄를 사했는데 무슨 또 죄를 사해야 된다고 하는가?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 또 무엇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인가? 교황이 면죄부를 발행함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습니까? 고해 성사할 때 신부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여 마치 신부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것이 성경적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써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비텐베르크에서 바로 이런 사실들을 보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참 진리의 회복은 종교 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되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도전은 각 시대마다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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