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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트립의 메시지(2)_하이델베르크 : 십자가의 신학(마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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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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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트립의 메시지(2)

하이델베르크 : 십자가의 신학(마 16:24)



하이델베르크 논쟁

지난주에 우리는 비전트립의 메시지 첫 번째 도시의 메시지로서 비텐베르크에서 나타난 참 진리의 선포와 또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면죄부의 교리는 물론 신학에서 그렇게 중요한 교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로마 교황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황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건축비를 마련하고자 면죄부를 적극적으로 판매하면서 이 자그마한 교리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95개조 논문을 발표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면죄부 판매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고, 이에 로마 교황은 루터를 미워하고 루터의 모든 주장을 철회시키고 심지어는 파문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비텐베르크의 영주인 선제후 프레드릭이 그를 보호했습니다. 95개조 발표 6개월 후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가 속한 어거스틴 수도원 종단 총회가 열렸는데 그때 루터가 비텐베르크 지역 대표로 참가하여 자기의 신학 사상을 해명하게 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적대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종단 소속의 수도승들과 비텐베르크 학생들이 루터를 에워싸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중서부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대학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발표한 루터의 논문을 하이델베르크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루터는 40개조로 이루어진 하나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28개의 조문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고, 12개의 조문은 철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발표한 이 논문은 우리에게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가 이 논문에서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에 대해 논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루터가 영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로마 카톨릭 신학은 교황을 높이고 교회당을 크고 화려하고 지음으로 교회의 영광을 과시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말하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은 사실 로마 교회의 화려함 같은 것들을 공격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 교회 신학의 바탕이 되는 스콜라 신학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즉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원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구원에 이르는 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고 하는 스콜라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의의 길, 즉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의의 길을 믿음으로 가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콜라 신학이란 무엇인가

스콜라 신학에서 ‘스콜라’는 학교를 말합니다. 즉 스콜라 신학은 중세 대학에서 발전한 신학입니다. 스콜라 신학은 11세기에 유명한 켄터베리의 안셀무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스콜라 신학을 최대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스콜라 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안셀무스의 저작에는 「모놀로기온 (Monologion)과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이 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 책을 쓴 동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동유럽까지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안셀무스는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의 진리들을 성경 없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를 철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의 능력을 빌려 설명하여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당연히 ‘그렇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학문의 과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콜라 철학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신학을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안셀무스의 목적은 무슬림처럼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합리적 설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엄청난 도움을 준 것입니다. 스콜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최정점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등장할 당대에는 하나님의 세계,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땅에서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리하여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의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하는 이런 주장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의의 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곳에서 의의 길을 찾아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논쟁의 내용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고 이성으로 유추하여 만든 규범들의 한계

루터는 28개의 조문에서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1조로 12조 까지는 율법과 자연적인 교훈을 따른 행위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라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교훈이란, 즉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교훈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따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행실의 원칙을 말합니다.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선한 행실의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 있는가? 루터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죄를 범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않고 인간 자신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교만과 인간의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오히려 죄가 된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이 생각할 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죽을 죄다.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경외 속에서 그들의 행위를 죽을 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위들은 죽을 죄가 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신들의 선한 행실이 죽을 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죽을 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한 행실 같은 것들을 자기의 자랑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죽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한계

13조부터 18조 까지에서는 자유 의지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신학자들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졌으니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자유 의지는 타락하지 않은 최초의 상태에서도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아담이 무죄한 상태, 타락하기 이전에도 자유 의지로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자유 의지는 타락하기 이전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타락한 이후에는 더더구나 선을 행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준비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히 절망해야만 한다.”


오직 십자가의 계시로부터 나온 신학이 참 신학이다

그다음 19조로 24조에서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영광의 신학이란 스콜라 신학을 의미합니다. 스콜라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진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높여 그것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9조를 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하나님의 영광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세계를 보고 유추하여 하나님은 이렇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 세계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작은 피조물을 보고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것을 보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 하나님의 등을 인식하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모두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등, 즉 하나님의 일부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진리를 알았다고 하여 우리가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고 은혜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25조로 28조에서는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행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그다음 26절을 보면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적은 결코 없다. 은혜는 이것을 믿으라고 하나 모든 것은 즉시 이루어져 있다.” 즉 믿는 자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이 믿음은 은혜로써 주어진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착한 행실은 어디로부터 와야 하

는가? 율법이나 인간의 도덕관념이나 이성으로 만들어낸 선한 행실의 규칙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인간의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근거로 하여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27조를 보면 그리스도의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라 부르고, 우리의 행위는 그 능동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 수동적인 행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모든 일들이 근거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낸, 우리가 발견해 낸 어떤 규칙들과 법칙들을 행함으로 우리의 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한 자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를 창조하셔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죄인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수 있는 행실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루터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씩 루터를 인도하셨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하는 상징적 용어로 당시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높이고  하나님에 버금가는 위치로 행세하는 로마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그 신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로마 교황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 종교 개혁의 모토가 나오는 것입니다. 루터는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인도를 받으며 종교 개혁의 큰 줄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자로 완성되어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루터를 인도하시면서 그를 통하여 진리들을 하나하나 밝혀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종교 개혁의 길을 걸어가고 참 진리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에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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