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하나님께 감사하라_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된 인생(롬 8:35-39)

페이지 정보

작성일2024-11-29

본문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된 인생(롬 8:35-39)


한 사람의 승리의 선언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한 사람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여기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여기 압도적인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러나’라는 말로 자신의 이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는 ‘앞에서 이미 말했던 말과 정반대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그러나’라는 말 앞에는 압도적인 승리와는 정반대되는 어떤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앞에서 그는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온갖 종류의 위험들, 온갖 종류의 아픔과 고통들, 온갖 종류의 비극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온갖 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우리가 인생에서 이런 일들을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경험 해봤을까요? 저는 기근이라고 하면 별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10살 전후할 무렵에 그때 아마 흉년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른들이 시판하던 쌀에 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나 알갱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들어 있다고 불평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안남미를 수입해와 공급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통일벼 재배를 시작하면서 매년 반복되던 흉년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환란이나” 라고 이야기했는데 제가 나중에 환란에 대하여 알게 되는 계기는 순교자들의 순교 이야기를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환란이 예수 믿기 때문에만 오는 것을 말하지는 않겠죠? 가정의 우환도 찾아오고 그로 인한 어려움도 겪긴 겪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찍이 병환을 앓고 그로 인해 집안이 매우 어려움에 처했던 것도 맞습니다마는 어린 시절이라서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르게 넘어갔습니다. 지나고 보니 정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어린 시절이니까 별로 큰 기억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운 기간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도가 말하는 이 용어들이 가지는 그 절대적인 수치, 그런 정도의 것은 제가 경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적신이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신’은 벌거벗은 벌거숭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지도 못한, 헐거벗은 상태를 극대화시킨 용어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실제로 ‘적신’이 많았습니다. 노예나 죄수를 잡으면 일단은 옷을 다 벗기고 끌고 가는 일들이 아주 흔하게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승리를 선언하는 이 분은 지금 자신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36절). 죽음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은 얼마나 얼마나 두려운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러나’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내가 겪어왔거나 혹은 지금 겪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넉넉히, 다시 말씀드리면 압도적으로 승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었으므로

그가 이렇게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에서 이야기했었던 모든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압도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38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확신하는 최종 결론은 아무것도, 이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부터 나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확신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확신한다’는 말을 원어로 찾아보니까 제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확신하노니’라고 하는 말은 ‘설득 당했다, 혹은 납득하게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즉 그의 확신은 맹목적인 확신이 아니라 설득을 당하고, 납득하게 된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이 확신에는 그가 이렇게 확신하게 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확신은 변경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간단하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자기를 설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자기를 설득하게 되었을까요? 설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나의 마음을 설득했고, 나는 그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확신입니다. 왜냐하면 니는 설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확고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입니다.


설득의 과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들을 진술하고 난 이후에 31절부터 ‘누가’라고 하는 말로 시작되는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31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다음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세 번째로는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네 번째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하시고,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여 그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현재의 고난보다 더 탁월한 영광스러운 기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아시고 그를 작정하셨고, 그를 부르셔서 그를 의롭다 하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이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 누가 이 사실을 흔들 수 있으며 부인할 수 있느냐고 감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자녀를 누가 대적할 수 있는가? 그는 당연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 사람들은 그 눈물을 보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으니, 그 사실을 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고발은 잘못했다는 사실을 밝혀 벌을 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고발하겠느냐?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고 하셨는데 고발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두 끝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고발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는 고발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발하고 늘 우리의 마음을 정죄하고 우리의 삶을 어둠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존재와 그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세력들입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의 공로를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의롭다 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고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성부께 끊임없이 당신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로써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너는 죄인이야. 너는 잘못됐어. 너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어. 너 같은 것은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어’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뇌이고 이 사실을 우리가 마음에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에 대하여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즉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이 계시며, 그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정죄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까요? 누가 끊을 수 있습니까?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절을 보면 또 다른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이 외에 그 어떤 것들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영광스러운 구원과 그것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네 가지 질문을 통하여 이 사실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대답은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 누구고 할 수 없습니다“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아들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환란과 시험과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노래

하박국서 3장 17절 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뉴스에서나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그러므로 고백하십시오. 그러므로 외치십시오.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입니까? 누가 우리를 고발할 것입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감사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