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9)_칭의에 대한 새 관점의 도전(롬 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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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9-18본문
시대의 격랑속에서 진리의 인도하심을 따르라(9)
칭의에 대한 새 관점의 도전(롬 3:21-26)
언약을 말하지만 시내 산 언약은 말하지 않는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관점의 주장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새관점은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 언약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은 시내 산 언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성취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셨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이야기합니다. 톰 라이트는 시내 산 언약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내 산 언약을 말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즉 유대 민족의 실패를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언약에서 언약을 이루는 데 근본적인 이스라엘 역사 전부를 잘라버립니다. 그는 오직 제 2성전 유대교, 또는 1세기 유대교만을 이야기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을까요? 그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 역사에서 보는 반유대주의, 특별히 현대의 반유대주의를 철저하게 싫어하고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비극이 발생한 이유가 기독교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 즉 유대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의 신학에서 제거하고 철저하게 유대인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는 것이 비록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의 신학의 근본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가?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간과하시므로 자기의 의로우심이 나타내신다는 것은 서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가령 재판장이 죄인의 죄를 간과한다면 어떻게 그 재판장을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재판장이 죄인의 죄를 눈감아주면 불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간과했습니다. 즉 죄를 ‘외면했다, 그냥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죄를 심판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셨으면 하나님은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25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를 화목 제물로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화목 제물”은 헬라어로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속죄소’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속죄소’는 법궤 뚜껑을 가리킵니다.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려 자기의 죄와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행합니다. 이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영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영 단번’이란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보다는 “속죄 제물”이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삼아 그에게 죄인의 죄를 모두 지우시고 그가 자기의 생명으로 죄인의 죗값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일이 정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즉 대신 죄값을 치르시는 일이 없었다면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의롭다고 하신 일은 불의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해도 의로우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어떻게 의롭다 인정받는가?
그러면 믿는 자의 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이야기합니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가 칭의를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 또는 구원의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칭의가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은 칭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죄인에 대해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이다.” 법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입니다. 한편 법을 어겼을 때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과 죽으심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초로 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의롭다는 선고는 우리의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칭의를 법정적 행위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을 때, 이것은 구원 그 자체가 아니고 구원 과정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이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냥 넘어가게 되는 거예요.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도 아니고, 구원받는 방법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최종적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그때까지 즉 우리의 종말의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을 우리는 구원의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그 구원의 서정의 한 단면입니다. 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구원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이라고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신학책 속에도 그렇게 말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전 과정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진리에 정통해야 하는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리를 바로 정통해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저는 이번에도 더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달러 위조지폐 감별사가 공부할 때 교육기간 동안 위조지폐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폐만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제가 오래전에 직접 그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 달러 감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위조지폐 감별사지만 공부할 때는 위조지폐를 가지고 공부하지 않고 진짜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훈련 끝에 가면 위조 달러를 진짜 속에 하나씩 섞어놓는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위조지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지폐만 옆으로 골라 놓으면 나중에 남는 것이 위조지폐입니다. 즉 가짜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짜를 정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대해 정통해야 합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하는 거랑 똑같던데요.” 똑같기는 무엇이 똑같습니까? 진리에 정통하지 못해서 그렇게 들렸을 뿐이지요. 우리가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정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누군가 엉뚱한 말을 해도 비슷하니까 그렇다고 인정하다가 결론을 보고 이건 아닌데 하며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는 법정적 선언입니다. 즉 죄인이 의인이라 인정받는다 해도 의가 어떤 속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선언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법정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모두 사라지고 우리 속에 의가 들어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선언일 뿐입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는 육신의 정욕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정욕이 유혹을 받으면 죄를 짓는 자리에 나가는 일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정욕 가운데 있는 우리가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역사하심으로 유혹에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다 버리고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우리 속에 옛 사람의 성품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이겨 나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칭의는 우리를 실제적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언적 의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선언적 의인 속에 성령이 들어와 계시면서 죄의 욕망을 절제하고,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면서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변하고, 우리의 성품이 변하고, 우리의 마음의 욕망도 점점 점점 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가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우리는 역사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완성 때에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구원의 한 과정이다
칭의는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 즉 죄인을 심판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에게 시행하시고 대신 죄인은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의로우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죗값도 안 치르고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믿는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칭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시는 놀라운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그 피 흘리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오늘 우리는 이런 저런 비슷비슷한 말들로 교회의 가르침의 알맹이를 모두 제거하고 전혀 엉뚱한 기독교를 만들려고 하는 이런 시도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천지에서는 교인들을 교체하여 교회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추수꾼 전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신천지 교인을 몇 사람 들여보내고 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을 포섭하고, 혹은 작은 교회는 신천지 교인들이 아예 대거 들어와서 교인의 대다수를 교체하는 것입니다. 교인의 절반만 바꿔도, 아니 3분의 1만 바꿔도 교회의 모든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를 통째로 신천지로 바꿔버리는 일들을 시도했습니다. 교회는 일찍 그것을 알고 경계하여 이제는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새관점은 교회 교인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학의 겉모양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속 내용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겉의 말들은 그대로 있는데 속 내용이 변화되어서 기독교가 속으로부터 완전히 바뀌어 버릴 상황이기 때문에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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