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2)_참 예배와 거짓 예배의 전쟁(창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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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5-12본문
참 예배는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2)
참 예배와 거짓 예배의 전쟁(창 4:1-8)
예배의 역사는 예배 전쟁의 역사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 받았으므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역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잘못된 예배가 들어왔고, 그로 인하여 예배의 역사는 예배 전쟁의 역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예배 전쟁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얼마 후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생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떠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마음속에 큰 위로를 얻게 되었고 새로운 소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아벨을 낳았습니다. 어느덧 가인과 아벨이 장성하여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각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였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을까요? 오래전부터 이 문제는 큰 수수께끼였습니다. 제물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으니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의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피 흘리는 제사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께 피 흘리는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농산물, 즉 피 흘림이 없는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 피가 없는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 흘리는 제사를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때에는 피 흘리는 제사의 규례가 세워져 있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제사를 피 흘리는 제사여야 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무슨 제사였을까요? 2절은 그들의 직업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절 말씀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를 직역하면 “날들의 끝이 되어” 입니다. 날들이 많이 지나갔고 그 날들의 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날의 끝이 되어 가인은 가인대로 하나님께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아벨대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즉 “날들의 끝”은 그들의 직업 활동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합당할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농사짓는 날들의 끝이 있습니다. 추수 때입니다. 목자에게도 양을 치는 날들의 끝이 있습니다. 새끼를 낳는 것과 양털을 벗기는 것입니다. 즉 직업 활동의 결실을 맺는 모든 날들의 끝에 가인은 가인대로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아벨대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의 문제였을까 제물을 드리는 자세의 문제였을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신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면 진정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두 제사의 진정한 차이는 예배자의 예배 자세에 있었을까요?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주신 처음 소득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아벨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볼 때, 가인은 자기 소산물 중에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다가 드렸다고 봅니다. 즉 아벨은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렸는데, 가인은 정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정성을 다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정성을 다하지 못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충분히 우리한테 주는 교훈이 충분히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가인과 아벨의 진정한 문제였을까요? 예배의 자세에 대한 그 교훈은 분명히 옳은 교훈입니다마는, 지금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적용해서 가인은 예배 자세가 틀렸고 아벨은 예배 자세가 올바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예배자를 먼저 받으신다
본문에서 우리가 좀 특별하게 보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어떻게 받으셨는지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본문에서 좀 특별하게 보이는 표현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즉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을 먼저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벨을 먼저 받으시고, 다음으로 그가 드리는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인을 받지 않으시고 이어서 그의 제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란 단지 예물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의 문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셨고, 가인은 예배자로서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아벨은 양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정도가 아니라 양을 치는 전 과정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는 양을 칭 때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양을 치면서 하루를 지나는 동안에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의 모든 산업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시리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날들의 끝에 양의 새끼 중에서 첫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예물을 드리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서 그가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아주 잘 감당했습니다. 즉 그가 양치기를 시작한 날들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그의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삶의 열매로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아벨의 예배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즉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이미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이미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자가 하나님께 자기를 드렸을 때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된 것입니다.
예배자의 삶의 문제
이사야서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열심으로 제사를 드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얼마나 싫어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이 싫어서 내가 냄새 맡는 것도 싫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문제였습니다. 예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예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한다는 의식은 없고 오직 제물을 드리는 행위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제물을 드리는 일만은 열심히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안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입니다. 마음은 사람들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것은 평소 일주일 동안 우리의 생활입니다. 친한 사람들이야 내가 어떻게 사는지 대충 알겠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서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의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날의 끝이 되어”라는 말은 그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예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자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가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하나님과 함께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가 추수 때가 되어 그냥 곡식단 하나만 달랑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 앞에 뭔가 드리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날들의 끝에” 하나님께 반짝하며 나타나 제사할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그 순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 시간에 우리가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예배자의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이 쌓인 후에
본문 3절은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월은 어떤 세월일까요? 이 세월은 우리의 평소의 삶이 진행되는 세월입니다. 그리고 이 세월은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쌓여진 세월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마다, 날마다, 날마다 삶이 쌓여간 세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살아갔던 그 세월의 끝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예배자를 받으시고 제물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배자는 상관 없이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배의 원리는 예배자가 준비될 때 그가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겁니다. 예배자가 없으면 제물도 없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 받기 전에 가인이라고 하는 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한 자로 말미암아 일어난 비극
문제는 그 일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가인은 마음속에 앙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제대로 해야 한다. 네가 마음에 그런 악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라고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듣지 않았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낯을 들지 않는 가인의 모습은 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가인이 낯을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든 것들은 무엇 때문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엎드려 있느니라”는 햇볕 놀이하느라 따뜻한 햇볕에 늘어져 엎드려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자가 사냥을 위하여 잔뜩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먹이감을 향하여 살금살금 기어가다가 적당한 거리까지 오면 딱 멈춥니다. 그리고 근육을 충분히 긴장시켜서 한순간에 달려가 사냥감을 덮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가 팍 하고 튀어나갑니다. 본문에서 엎드린다는 것은 사자가 사냥 직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동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가 지금 가인을 그렇게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너를 원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죄가 가인을 사냥하기 위하여 잔뜩 노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자신을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죄,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이 죄의 모든 것을 알고 지금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경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최초의 예배 전쟁은 거짓 예배자가 참 예배자를 죽이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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