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기쁨으로 순종하라(5)_하나님의 권위를 깨달으라(삼상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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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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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순종하라(5) 

하나님의 권위를 깨달으라(삼상 24:1-7)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의 신학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리폼드(Reformed) 신학입니다. 그리고 이 리폼드(Reformed) 신학의 기초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권세라고 부르는 거예요. 신학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핵심적이며 기본적이며 기초가 되는 이 사상과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그러면서 우리한테 익숙한 문서는 무엇이냐 하면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입니다. 소요리문답의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답을 한 겁니다. 이 질문은 칼빈의 요리문답 제1문에서 온 것입니다. 칼빈의 시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지성인의 관습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온 것입니다. 중세부터 당시까지 유럽 사회에서는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의 문제였고, 지성인이라면 자기가 책을 쓰려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해서 먼저 말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칼빈의 답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제네바 요리 문답에서 사람이 사는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웨스터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다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 삶의 목적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이 단순한 지식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을 생생한 삶으로 바꿔놓은 대답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17세기 초에 화란 개혁교회는 알미니우스라는 신학 교수로부터 칼빈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자였지만 칼빈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연구하다가 그쪽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따라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1618-19년 도르트에서 총회가 열리고 거기에서 5가지로 신학적 반박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5개의 영어 철자로 정리하여 튤립(TULIP)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T는 Total Depravity,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입니다. 두 번째 U는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께서 인간을 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L은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I는 Irresistible Grac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항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뜻대로 믿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P는 Perseverance of the Saint,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마지막까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조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과 정신이 신학 속에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고 쾌감을 느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신학을 배웠고 깨달았다면 나의 생각, 나의 사고방식, 나의 삶 속에 그 신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즉 신학이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권위를 깨달으라” 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동의어입니다. 이 말은 통치권이라고도 번역됩니다. 통치권은 최고의 권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세라고 하는 이 주제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왜 주어졌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1차적으로 우리는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고 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선악과는 무엇일까요? 선악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권세를 마음으로 깨닫고 그 권세를 인정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기쁨으로 순종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권위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순종합니까?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거역하게 됩니다. 아담이 왜 거역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권위를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임된 권위에 순종하는 문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기 위하여 특별히 위임된 권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임된 권세”라는 용어는 제가 오래 전 청년 시절에 읽었던 워치만 니의 『영적 권위』에 나오는 영어입니다. 워치만 니는 통찰력 있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러한 케이스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된 권세, 위임된 권위를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권세를 깨달은 자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권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의 가르침은 안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반문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스릴 때 직접 통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일마다 때마다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셔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의 원리를 깨닫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배우고, 연구하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순종의 심성을 키워나가고 하는 과정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깨닫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을 위하여 세운 말씀 사역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임된 권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임된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위임된 권세는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지도합니다. 또 다른 위임된 권세는 세상 권세자들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질서와 안녕을 위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위임된 권세자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 권세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먼저 깨말아야 한다

그런데 위임된 권세를 인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깨달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권세 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깨닫지 못하면 위임된 권세에 대한 순종은 율법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깨닫고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위임된 권세자들을 세워 행하시는 일들을 달게 받아 순종하는 것이 바로 진실한 순종입니다. 잠언 18장 12절 말씀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권세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 앞에 순복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 앞에 순복합니다.


다윗의 경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상당히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숨었는데 마침 그 굴에 사울 왕이 혼자 들어왔습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고, 사울 왕은 홀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상황을 보면 부하들의 말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 왕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옷자락을 벤 것조차도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해칠 수 없다” 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를 보면 원한을 품을 만한 관계입니다. 10년 세월 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고 결국 원수의 나라에 망명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 왕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한 그의 존중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이 성전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전을 거룩한 집이라고 하는데 성전이 거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성물은 왜 성물이 되는 것일까요? 왜 성물이 거룩한 물건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성도의 정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참된 순종을 가르쳐야 한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위임된 권세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에 회개를 한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목사님에 대해 제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히 잘못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요는 제 마음속에 진정으로 목사님을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 못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제는 목사님 곁을 떠났고, 목사님도 은퇴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부산에 오실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한번 잘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되는데 생각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특별히 권위의 문제를 가르치는 것은 목사에게 순종하라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해로운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저는 후회를 많이 합니다. “안 가르친 것이 내 잘못이다.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르쳤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반발하더라도 가르쳤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왕이시다”라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왕의 권세에 순복하는 삶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순종의 과정을 가르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순종을 배울 때 우리는 어떤 과목을 먼저 배울까요? 권세의 과목을 배웁니다. 그리고 권세 앞에 순복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께 순복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위임된 권세에 순복하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배워야 하나님의 큰 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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