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3)_부활 : 사망을 죽이는 방법(행 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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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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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3)

부활 : 사망을 죽이는 방법(행 2:11-24)



부활의 기쁨과 하나님의 방법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우리에게 부활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부활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망을 죽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방법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함께하셔서 큰 권능을 나타내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친히 증거하신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반전: 권능의 주가 겪으신 비참한 죽음

그런데 23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큰 역사와 정반대되는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주시고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절 후에 보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람들에게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여기서 '법 없는 자들'이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은 로마 군병들이며, 그 십자가 형을 언도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바로 법 없는 자들, 즉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율법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자신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역설이자 반전입니다. 권능으로 역사하셨던 분이 가장 무기력하게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반전: 사망의 감옥을 터뜨린 부활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이 24절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의 고통'은 일종의 감옥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는 말씀처럼, 사망이라는 감옥이 그를 가두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고 죽음 가운데 머무셨습니다. 사흘 동안 죽음에 갇혀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망에 계속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망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의 연속을 목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맞이하고 고통을 당하셨으며, 죽임을 당하여 장사 지낸 바 되어 무덤에 시신이 안치되는 모든 과정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손으로 치고 채찍질하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통해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상하게 한다'는 말은 짓밟고 또 짓밟는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해서 짓밟아 마침내 뱀의 후손이 멸망할 때까지 짓눌러버리는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실제 모습은 뱀의 머리를 짓밟아 승리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처참하게 패배한 자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은 낮아지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높이 들리셨으며, 옆구리에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사탄의 착각과 하나님의 치밀한 승리

어떻게 계시의 말씀과 실제 모습이 이렇게 정반대일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길은 분명 승리자의 모습이었는데, 막상 여자의 후손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탄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이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수없이 죽이려 시도하다 실패하기를 반복했으나,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탄은 스스로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축배를 들면서 "이제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졌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는다는 승리의 예언은 사라졌다"라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무덤에 갇혀 있던 분이 무덤 문을 터뜨리고 살아나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죽이기 위해, 그리고 사망을 멸망시키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번 주간에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사망을 죽이시는 방법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굳이 부활이어야 했을까요? 그냥 생명을 주시면 안 되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굳이 고난을 받으시고 모욕과 멸시를 견디며 십자가 형벌이라는 죽음을 통과하여 무덤에 머무는 과정을 겪으셔야만 했을까요?


왜 고통과 죽음을 통과해야 했는가

예수님이 고통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첫 번째 이유는 죄의 비참함과 사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의 형벌과 죽음은 죄가 얼마나 처참하고 사악한 것인지를 증명합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진노의 대상으로 보고 계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형벌의 집행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주로서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이 형벌을 받는 모습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는데, 이는 아무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믿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부인부터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일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형벌을 받으시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죽음을 맞이하신 것은, 그분의 죽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음에 이른 독생자, 무덤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죄 값을 모두 치르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담당하신 죄의 대가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불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수증'이나 '완납 증명서'와 같습니다. 값을 다 치른 뒤에 증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유일한 증거인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하는 생명의 능력

두 번째로, 부활은 사망의 권세가 생명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죽음 앞에서 쏟아냈던 절망적인 말들을 기억합니다. 성경은 사탄이 죄와 사망을 무기로 우리 가운데서 왕 노릇 했다고 증언합니다. 아무도 이 사망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대단한 권세자라 할지라도 결국 죽음 앞에 굴복했습니다.

인간 세상의 최고 권세자인 황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무덤들은 그들도 결국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누구나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무덤에 갇히면 다시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에서 다시 나오기를 소망하며 부장품을 넣고 순장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죽어서도 살았을 때처럼 풍요를 누리고 신하들의 보필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망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분 안에 생명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참된 생명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첫 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이후에 계속해서 같은 열매가 열릴 것임을 의미합니다. 사과나무를 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첫 열매가 열리면, 그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사과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생명에 동참하는 자들은 모두 이 부활의 열매가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맞이할 죽음의 새로운 의미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으면 아예 죽음을 겪지 않고 사는 길은 없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 죽음이 너무나 싫어서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니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이들이 무척 부러웠고,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있게 해달라고 실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죽음을 겪게 하셨으나 그 죽음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육신적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부활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망을 죽이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 사망을 죽이시는 이 거대한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부활을 경험하게 될 우리는 마침내 "죽음이 죽었다"라고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을 완전히 멸망시키시는 그 과정을 우리로 하여금 직접 경험하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망은 죽었다"는 장엄한 선포

마지막 부활의 날, 우리 모두가 부활하는 그 순간에 사망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가 부활하며 "사망은 죽었다! 사망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그 웅장한 선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오늘 할렐루야 찬양대가 찬양한 것처럼, "살아나셨다"는 고백이 반복되며 점점 커져 웅장한 화음을 이루듯이, 우리의 부활 역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장엄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외치지만, 우리가 부활하는 그날에는 "사망이 죽었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담대하게 꾸짖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중에 이토록 당당하고 장엄한 선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사망은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망은 이미 죽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믿음의 용기를 내십시오.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생명을 누리는 복된 자리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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