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6)_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롬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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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5-08본문
사망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승리(6)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롬 14:8-9)
부활의 소망으로 여는 새로운 시대의 지평
하나님은 인류를 향한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 땅의 도도한 역사 속에서 실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모든 계획은 시대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정교하게 단계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응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성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이 성도들이 가졌던 믿음의 뿌리는 매우 견고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안락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을 향한 뜨거운 소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특히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 거하며,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오늘은 그 믿음의 실체, 즉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부활의 소망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전모가 어떻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순한 종교적 위안을 넘어,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위로와 능력을 부여합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의 거룩한 도리가 바로 이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존재의 근원적 질문: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인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는 저에게 개인적으로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갓 입학하여 신학의 깊은 바다를 탐구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일입니다. 어떤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제 마음속에 깊은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감동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저는 도서관에 하루 종일 머물며 그 교수님이 쓰신 다른 글들과 논문들을 샅샅이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논문의 제목이 바로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에 대하여'였습니다. 여기서 '생사간(生死間)'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생(生), 즉 우리가 숨 쉬며 살아 있을 때와 사(死), 즉 육신의 생명이 다하여 죽었을 때를 모두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과, 그 이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그 너머의 시간까지 포함한 우리 존재의 전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생애와 사후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변치 않는, 그리고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위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사실 이 제목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유산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563년 작성된 이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묻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절박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지탱해 줄 참된 위안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안위를 넘어선 '유일하고 영원한 위로'의 성격
어떤 이들은 '위로'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이 요리문답이 자칫 인간 중심적인 인본주의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이지요.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결코 인본주의적 감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위로'라는 말은 때로 '안위' 혹은 '위안'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위로를 주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고대 중세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며 『철학의 위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 했고, 실제로 많은 지식인이 철학에서 삶의 의미와 위로를 찾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이 위로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예술적 성취나 사회적 성공이 큰 위안이 됩니다.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다른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로들은 부분적입니다. 돈이 위로가 되는 것은 돈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며, 권력이 위로가 되는 것 역시 권력을 탐하는 이들에게만 유효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위로'는 빈부의 격차나 성별의 차이,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하는 위로입니다. 특정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위안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실존적 고통인 죄와 죽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영원한 위로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바라본 부활의 실체와 아브라함의 순종
이 위로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과 확신이라는 이 거대한 구원의 파노라마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총집결될 때 발생하는 신성한 열매입니다. 죄로 인해 비참한 지경에 빠져 신음하고, 인간의 한계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 요리문답을 통해 인생의 전무후무한 해답을 주십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이유는 내 인생이 더 이상 나 자신의 연약한 어깨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권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얽매던 모든 저주와 비참으로부터 내가 해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본질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그의 가슴 속에는 바로 이 부활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네 자손 이삭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삭이 자녀를 낳기도 전에 그를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내가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들을 산 아래 남겨두고 이삭에게 장작을 메게 한 뒤 산을 올랐습니다. "재물은 어디 있느냐"는 아들의 아픈 질문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죽을지라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이 부활의 믿음이 그를 버티게 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믿음의 담력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때로는 죽은 자를 다시 돌려받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고,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 받는 역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죽음이 인간을 완전히 정복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죽음의 힘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강력한 예표였습니다.
죽음의 박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최종적 승리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죽음은 단순히 힘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 자체가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주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로 확증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그분을 따르는 모든 성도의 부활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죽음의 통치는 끝이 났고, 생명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천연두 박멸의 역사적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인류 역사에서 천연두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괴롭혀온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높은 치사율을 자랑했고, 설령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습니다. 저의 세대만 해도 어깨에 그 예방 주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천연두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인류에게서 천연두가 완전히 박멸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천연두로 죽거나 고통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질병으로서의 천연두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대한 완전한 박멸 선언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죽음을 마주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힘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믿음이 있기에 성도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두려움 대신 하나님께로 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과 그리스도의 소유된 기쁨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 요리문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을 통해 우리의 위로를 확증합니다. 첫째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분은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치르셨고,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요리문답은 이 상태를 '사탄의 독재(Tyranny of the devil)'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노래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탄이 심어놓은 가치관과 삶의 원리, 즉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그 독재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시고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진정한 자유이며 위로의 시작입니다. 둘째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세밀하게 보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과 역경, 심지어 우리의 실수까지도 합력하여 결국에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거칠고 성긴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세시는 세심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실패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영생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치시고 보증해 주십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이제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즐겁게, 그리고 즉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생동감 넘치는 순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부활의 영광을 향한 성도의 담대한 전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그 계획을 즉시 가동하셨습니다. 성자는 중보자가 되셨고, 이 비밀은 역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이 안개 속에서 이 비밀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전모가 투명하게 공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친히 체험하시고, 죽음까지 맛보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비참을 체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모든 고통에 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육체를 입는 부활의 소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즉 우리의 전 생애와 영원이라는 시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핏값으로 친히 사신 존귀한 분들입니다. 더 이상 사탄의 독재 아래 떨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견고한 믿음의 터 위에서 세상의 온갖 풍파와 죽음의 위협을 넉넉히 이겨내고, 날마다 승리의 찬송을 부르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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